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마즈 요시히사 (문단 편집) == 생애 == 어렸을 때는 조용한 성격으로, 세 동생들에 비해 과소평가되곤 하였다. 하지만 친자식, 친형제라도 뒷치기가 횡행한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동생들이 온 힘을 다하여 형을 보좌한걸로 봐서는 보통인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요시히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후에 요시히사의 조카인 토요히사를 초대하여 미미가와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하게 된다. 다 듣고 난 후에 '듣던 것보다도 무서운 대장이로다. 저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 시대]]의 명장 [[쿠스노키 마사시게]]에 비견될 정도의 지휘다!' 라고 감탄하였다 한다. 또한 나중에 요시히사를 직접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시히사가 '동생들과 가신들로 하여금 싸움에 승리하였을 뿐,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라고 하자, 이에야스는 '자신이 나서지 않고서 이기는 것이야말로 대장의 귀감이다!'라며 감탄하였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이에야스가 요시히사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타다요시의 바람대로 요시히사 이하 4형제가 합심하여 1570년 사츠마, 1573년 오오스미, 1578년 휴가까지 병합함으로써 '삼주통일(三州統一)'(전통적으로 시마즈 씨가 이 세 주의 슈고를 지냈으나, 슈고 다이묘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오오스미와 휴가를 영국화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을 이루게 되며, 이로써 전국 말기의 [[규슈]] 3강(시마즈, 오토모, 류조지)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1578년에 규슈 북동부의 패자가 된 [[오토모 소린]]과의 싸움에서 대승하면서 오토모가 세력이 일단 빠지게된다. (미미가와 전투). 아무튼 한 방 먹이긴 했지만 북규슈에서 오토모 다음가는 양대 세력인 [[류조지 타카노부]]가 아직 건재해서 줄다리기만 하다가, 1584년 류조지와 결전을 벌이게 된다(오키타나와테 전투). [[시마바라 반도]]를 지배하던 아리마 씨는 류조지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반란을 일으켜 시마즈 쪽에 붙었고, 이를 계기로 규슈 북부의 주변 호족들이 술렁거리게 되자, 다카노부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아리마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요시히산는 동생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군을 맡겼다.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8,000 정도로, 6만(실제로는 2만 정도라는 설도 있음)의 류조지군에 비해 수적 열세였으나 갈대가 무성한 늪지대와 늪지대 사이의 좁은 길이라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 일단 한 번 전투를 걸었다 도망치는 척 하며 오키타나와테로 유인한 후, 갈대에 숨어있던 복병을 이용해 기습했다. 류조지군도 만약을 대비해 시마바라만 해안선과 산 쪽으로 별동대를 꾸렸지만 시마즈는 이것도 예상해 아리마 측 수군과 조총 부대를 이용해 격퇴했다. 이 전투로 류조지 가문이 바로 망하진 않았지만, 다카노부 본인을 위시한 류조지 사천왕 등, 류조지가의 우수한 무장 들이 다수 사망하면서 결국 향후의 세력판도를 순식간에 시마즈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시마즈가 규슈 전체를 통일해나가는 데 위기를 느낀 [[오토모 소린]]은 당시 [[혼슈]] 대부분을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접촉해 구원을 요청했는데, 이 사실을 안 시마즈 요시히사는 히데요시가 건너오기 전에 규슈를 제압해두고 맞아 싸울 심산으로 전 규슈의 병사 5만을 긁어모아 오토모를 밀어버리러 간다. [[이와야 전투]]에서 오토모 측의 용장 [[타카하시 쇼운]]의 분전으로 시간을 너무 끄는 바람에, 결국 오오토모를 밀어버리지 못하고 규슈에 도착한 도요토미의 대군에게 압도당하자 항복하였다. 이후 시마즈는 도요토미에게 새로 얻은 대부분 땅을 토해내고 요시히사에게는 사쓰마 1국, 동생 요시히로에게 휴가 1국, 도요토미와의 협상을 이끌었던 가신 이주인 타다무네에게 오오스미 1국이 주어졌다. 결과적으로 시마즈 가문 자체는 남규슈의 3국을 영유하게 됐지만 규슈 전체를 손에 넣을 뻔했던 요시히사는 도요토미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시마즈 가문은 요시히사가 이끌어갔지만, [[임진왜란]]에 참전한 요시히로의 병력이 시마즈의 국력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을 의심한 히데요시는 시마즈 영지의 [[고쿠다카]] 재조사를 명한다. 그 결과 고쿠다카에 비해 터무니 없게 적은 병력이 참전한 것에 대한 히데요시의 추궁에 요시히사는 요시히로에게 당주 자리를 넘기고 은거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큰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가 일어났지만 일단 요시히사는 이에야스의 선심 공세에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당주는 동생인 [[시마즈 요시히로]]였고,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 전야 상황에서 이에야스의 후시미성 원군 요청에 천여명의 병력을 데리고 갔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거병하자 서군에서 싸우게 되었다. 어차피 서군 한복판에 떨어진 꼴이었고 요시히로 입장에서도 자신을 1국의 영주로 만들어 준 이시다 미츠나리를 그냥 못본척 할 수도 없었다. 너무 적은 병력으로 서군에 참전하게 된 요시히로는 사쓰마에 증원 병력을 요청했지만 내심 도요토미와 미츠나리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요시히사는 답장조차 하지 않고 무시했다.[* 다만 요시히사의 의도를 떠나서 어차피 증원할 수 있는 병력 자체가 없다는 해석도 있다. 당시 영지인 사쓰마의 병력은 임진왜란, 특히 [[노량 해전]] 때 막대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하고 요시히로는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규슈에 복귀했지만 그때도 요시히사는 물론이고 요시히로의 친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조차 마중 나오질 않았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 것은 이에야스는 동생 요시히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전한 책임을 추궁했는데, 이에 요시히사는 동생이 [[치매]] 걸려서 그랬다고, 독박씌워 버렸다.''' 그래서 동생을 내친 막장 형이라고 조롱당하기도 한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문을 처벌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당주 직을 내려놓고 물러나는 조건으로 요시히로 개인에 대한 처벌도 불문에 부친다. 요시히로 한 사람의 대외적 이미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가문과 목숨을 모두 지킬 수 있었으니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나름대로 현명한 처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서군에 참여한 책임으로 동생 요시히로가 은거하고 요시히로의 아들인 타다츠네가 당주 자리를 이었고 요시히사가 그 후견인으로 시마즈 가문을 운영하는 형태가 되었다. 요시히사는 도요토미는 물론이고 도쿠가와에도 신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이 되길 바랬지만 타다츠네는 요시히사 몰래 교토로 직접 가서 이에야스를 회견했고, 이름 한자를 받아 이에히사(家久)로 개명했다. 이로서 뒷방으로 물러난 전임 당주 요시히로, 요시히사 둘과 현직 당주 이에히사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세간에서는 "사쓰마에는 당주가 셋이고 가신도 셋인데, 이들이 한자리에서 만났을땐 제법 흉흉한 분위기였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 정실이 두 명인데 둘 다 [[근친혼]]이다. 첫 번째 정실은 아버지의 여동생, 그러니까 고모이며 두 번째 정실도 고종 사촌이면서 할아버지의 양녀, 즉 고모였다. 요시히사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 [[카메쥬]]를 동생 [[시마즈 요시히로]]의 아들 [[시마즈 타다츠네]]와 결혼시키고 가독을 물려줬다. 하지만 부부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아 카메쥬히메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